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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공부

이스라엘 건국과 로스차일드 시오니즘 '시온으로 돌아가자'라는 말로 민족국가 수립의 염원을 담은 말이다. 시온은 유대교에게 영원한 고향이자 구원의 이름을 대표한다. 1897년 8월 29일 스웨스 바젤에서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의 주도아래 '유대인 국가를 세운다'는 역사적인 결의문인 바젤강령이 채택된다. 헤르츨에 의해 지속적으로 운동이 계속 되다가,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실패하고 대학살이 일어나자 많은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를 감행한다. 또한 러시아가 반유대주의를 정책으로 삼으면서 예루살렘에 많은 유대인이 모이게 된다. 이때 에드몽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유대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한다. 그로인해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도시로 바뀌기 시작했다. 영국은 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랍과 유대인.. 더보기
금융시장의 뿌리_ 로스차일드 가문(2) 1812년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사망하며 이런 유언을 남겼다. 첫째, 가문 은행의 요직은 반드시 가문 내부에서 맡아야 한다. 남자만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다. 둘째, 사촌끼리 결혼함으로써 재산의 외부 유출을 막아라. 셋째, 재산 상황을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말라. 넷째, 재산상속시 변호사를 개입시키지 말라. 다섯째, 장자가 우두머리다. 가족이 만장일치로 동의할 경우에만 차남을 후계자로 할 수 있다. 유서 내용 위반자는 재산 상속 건 일체를 박탈한다. 아버지와 함께 유럽전역에서 금융업을 일으키던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크게 활약했다. 1806년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내려 유럽의 공산품 가격이 폭등했을 때는 밀수 루트를 통해 유럽 전역에 물품을 대며 크게 돈을 번다. 이.. 더보기
금융시장의 뿌리_ 로스차일드 가문(1) 유대인 역사의 클라이 맥스는 사실상 로스차일드가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전까지는 스페인계 세파르디 유대인들이 주도해 왔다면, 로스차일드가 이후로는 독일계 아슈케나지가 유대인 사회를 주도하게 된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국제적인 대규모 금융산업을 일으킨 로스차일드 가문을 알지 못하고는 오늘날 세계 금융시장의 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유대인 이야기 p.476 로스차일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 출신이다(게토: 중세 이후의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지역). 독일 국내적으로는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대자본이 필요했고, 국제적으로는 무역증가에 따른 대금결제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또한 유럽이 나폴레옹전쟁으로 휩쓸리고 있었다. 로스차일드는 이런 어려운 시기에 다.. 더보기
18세기 영국에서의 유대인(2) 영란 은행의 탄생 17세기 후반 영국의 대외무역 팽창으로 상인과 해운업자들의 자금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새로운 금융기관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었다. 또한 오랜 전쟁으로 재적적자에 시달리던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 윌리엄은 국채를 발행해 전쟁을 준비한다. 하지만 전비가 부족했고, 이때 유대인 금융가들에게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한 돈 120만 파운드를 요청한다. 유대인 금융가들은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는 민간은행의 설립 허가를 요구한다.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 은행을 통해 은행권 발권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은 120만 파운드를 연이자 8퍼센트로 빌리는 대신 원금을 갚지 않아도 되는 영구채무로 유대인들과 협상했고, 이때부터 민간은행이 은행권 독점 발권력을 소유하여 중앙은.. 더보기
18세기 영국에서의 유대인(1) 영국은 16세기 말까지만해도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에 밀리는 변방국이었다. 상업을 천시했고, 오히려 정복활동과 약탈을 일삼았던 국가였다. 그런데 2백년 후 5대륙 45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세계의 통치자가 된다. 그 2백년간 영국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영국은 당시 유럽을 주름 잡던 스페인에 대한 게릴라 전을 통해 많은 재산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해상교전을 통해 전략적으로 견제했다. 1570년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의 전쟁에서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해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청교도 혁명과 크롬웰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에 왕이된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로 전제정치를 실시하며 의회와 대.. 더보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동방무역 향신료는 유럽을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식민지 획득 시대로 이끌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동방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다. 향신료와 동인도 항로 원나라에 의해 보호받던 실크로드를 오스만 제국이 차지하게 되자, 향신료 무역이 막히게 되어 신항로의 개척이 요구되었다. 1498년에 포르투갈이 제일 처음으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가는 항로를 찾았다. 이후 1519년 스페인도 신항로를 발견하자 두 나라가 경쟁하다가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에게 패해 16세기 말부터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인도 항로를 차지하게 되었고, 17세기 중엽부터는 유대인이 주도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해상무역을 차지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한나라에 비견되는 막강한 권리를 받았다. .. 더보기
중상주의와 유대인(3)- 유대인과 금융 네덜란드 정부는 동인도회사의 행상 교역에 집중하기 위해 전쟁 중이던 스페인과의 12년 휴전협정을 맺을 정도로 열성을 쏟아부었다. 이것이 바로 중상주의의 진수였다. 동인도 항로는 워낙 장거리 항로인데다 위험요소도 많아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동인도 회사의 주식 거래가 잘 되는 것에 착안해 새로운 주식을 발행하여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1608년 암스테르담 보르스라는 '상설'증권거래소를 설립했다. 투자자들이 줄을 이었고, 많은 유럽의 자금이 네덜란드로 모여들었다. 1620년 동인도회사는 엄청난 돈을 벌어 주주들을 부자로 만들었고, 1690년에는 동인도회사의 배가 156척으로 불어났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와 증권거래소는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의 효시이다. 아슈케나지 유대인 1590년대를.. 더보기
중상주의와 유대인(2)- 네덜란드의 부 영국과 네덜란드가 해상권을 쥐게 되면서 유대인들의 무역은 브뤼헤와 앤트워프 시절의 시장을 승계할 뿐 아니라, 동인도 항로까지 섭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590~1609년의 20년간을 '유대 대상인의 1차 중흥기'라 부른다. 소금에 절인 청어 유대인들이 새로이 정착하게 된 네덜란드는 척박한 땅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계무역에 집중한다. 때마침 해류의 변화로 발트해 연안에서 잡히던 청어가 14세기부터 네덜란드 연안인 북해로까지 밀려오게 되면서 청어의 생산량이 급증한다. 이때 네덜란드의 한 어민 '빌렘 벤켈소어'가 청어 염장법을 고안하게 되면서 1년 내내 보관할 수 있는 청어 절임을 판매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청어절임을 만들 때 필수품인 소금을 주목하여 비싼 한자동맹으로부터 공급받던 암염 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