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정부는 동인도회사의 행상 교역에 집중하기 위해 전쟁 중이던 스페인과의 12년 휴전협정을 맺을 정도로 열성을 쏟아부었다. 이것이 바로 중상주의의 진수였다.
동인도 항로는 워낙 장거리 항로인데다 위험요소도 많아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동인도 회사의 주식 거래가 잘 되는 것에 착안해 새로운 주식을 발행하여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1608년 암스테르담 보르스라는 '상설'증권거래소를 설립했다. 투자자들이 줄을 이었고, 많은 유럽의 자금이 네덜란드로 모여들었다. 1620년 동인도회사는 엄청난 돈을 벌어 주주들을 부자로 만들었고, 1690년에는 동인도회사의 배가 156척으로 불어났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와 증권거래소는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의 효시이다.
아슈케나지 유대인
1590년대를 전후해 독일과 동유럽에 살고 있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도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이들은 독일 라인 강 유역 및 인접한 프랑스 지역에 살다가 11~13세기 십자군 전쟁 때 러시아 등 동유럽으로 피신한 유대인을 일컫는다.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유대인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스페인/포르투갈계인 세파르디 유대인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고, 이 둘은 통합되기보다 차이가 나는 삶을 살았다. 예배당인 시나고그도 따로 지어 살았고, 세파르디가 소수의 상류층을 형성했던 반면, 아슈케나지는 다수의 하류층을 이루었다. 세파르디가 이슬람과 라틴세계 사이에서 고전 과학, 철학의 전달자 노릇과 귀금속 장인, 수학자, 항해도 제작자 노릇을 했다면 아슈케나지들은 영세 수공업등에 종사했다.
암스테르담 은행
증권거래소가 설립된 이듬해인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이 탄생했다. 이 시기 유럽의 각종 주화들이 1천종이 넘었고, 위조화폐, 저질 주화 문제가 대두되어 '공적은행'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수표와 비슷한 개념으로 계좌를 가진 상인으로부터 금, 은을 받는대신 은행 화폐를 통해 거래하게 하였다. 세계 최초의 은행은 11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였지만, 금융업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암스테르담 은행이었다.
이 시기 일반인들은 은화를 잘라내어 사용하거나 주화를 주조하여 사용했는데, 주화주조시 발생하는 비용을 암스테르담 은행이 부담함으로써 대부분의 금괴, 은괴가 암스테르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또한 주화의 무게와 함량 등을 분석해 저질 주화의 폐습을 종결시켰고, 30년 전쟁 기간 중에는 안전한 보관을 위해 은행에 더 많은 돈이 입금되었다.
17세기 내내 네덜란드가 상업과 무역의 패권을 거머쥘 수 있던 이유는 세계 최초의 지폐 대량유통에 있고, 이것이 최초의 세계 기축통화가 되었다.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은행
암스테르담 은행은 예금만을 관리하다가 대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자가 발생했고, 은행에 주화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화폐는 유통되는 '신용'이 창조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전역에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 은행을 축으로 한 경제 형태가 등장했고, 네덜란드의 금리가 경쟁국들보다 훨씬 낮아 경쟁력이 생겼다.
주식거래소에서는 동인도 회사 주식의 배당이 시작됐고, 배당률이 높아 더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래서 주가가 8배까지 오르게된다. 그래서 1621~1650년 사이의 30년 기간을 "유대 대상인의 2차 시기"라 불린다.
유대인 길드가입 제한
네덜란드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1632년 유대인의 길드 가입을 금지시킨다. 길드에서 제외되는 것은 물건을 만들지도 팔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인은 경쟁 우려가 적은 분야와 조합이 없던 직군에 몰렸고, 특히 금융산업에 힘을 쏟게 된다.
시간이 지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막강했던 길드를 와해시킨다. 독과점방식의 길드 대신 고객만족, 착한 가격으로 승부하여 자유경쟁체제를 도입하게 되는 것이다.
서인도 회사 설립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09년 맨해튼 섬을 발견하고 1612년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한다. 이곳이 지금의 뉴욕이다. 이곳에서 아메리카 항로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서인도 회사'가 1621년에 설립된다. 이를 통해 모피, 노예무역, 사탕수수 등을 거래한다. 서인도제도의 유대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을 대규모로 시작하였고, 이곳에서 생산된 설탕, 당밀이 전 유럽에 수출된다.
다양한 금융기법
보험관련 분쟁을 해결하고 보험의 신뢰를 높이는 보험국과 무역금융을 지원하는 여신 은행(대부, 대출업무)이 생겨난다. 또한 경제정보를 전달하는 신문사들이 생겨나 더 많은 거래를 일으키고, 배가 항구에 들어오기도 전에 주식을 파는 선물시장이 발전하게 된다. 유대인의 독점욕으로 시작된 선물시장은 곡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품목으로도 확대되었다.
유대인에 의해 '증권거래인'이라는 직업도 생기고, 17세기 후반에는 액면 부할주도 등장한다. 유가증권을 담보로 대출한 돈을 다시 투자하는 차입투자 개념과 여러 금융기법들이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게 등장한다. 자금 보호를 위하여 유대인인 것을 감추기 위해 익명거래방식의 무기명 채권도 개발한다. 이렇듯 암스테르담은 자금시장이었고 금융시장이었으며 증권시장이었다.
30년 전쟁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2차 전쟁인 '30년 전쟁'은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벌어진 최대이자 최후의 전쟁이었다. 처음에는 종교전쟁의 성격을 뗬지만, 갈수록 유럽 패권을 확립하기 위한 대규모 전쟁이 되어 최초의 국제전이되었다.
1568년과 1648년 사이에 1, 2차 전쟁을 치른 80년 전쟁과 독일의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모든 군주는 자기 백성의 종교를 자유럽게 결정할 수 있다)의 체결로 종식된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강국으로 부상해 부르봉 왕가가 득세하고, 스웨덴은 발트해의 지배권을 장악했으며,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을 인정받는다. 반면, 스페인은 유럽 내 주도권을 잃고 합스부르크 가는 우월권을 뺏긴다.
네덜란드는 독립 후 개인의 자유와 관용 정신이 넓게 퍼졌다. 양심과 사상, 언론과 출판의 자유도 보장되었다.
30년 전쟁은 유대인이 유럽 경제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계기가 된다. 전쟁기간 동안 군부대에게 음식과 보급품을 공급하는 일을 통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고, 이를 통해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에서 다른 주민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는다.
유대인의 활약은 전쟁이후에도 이어져 독일의 영주들이 절대주권을 구축하기 위해 유대인을 이용하였다.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중세 길드 제도에서 벗어나 유대인을 통한 자본주의 경제와 상업, 수공업 등이 장려된 것이다. 또한 유럽 각국에서도 궁정 유대인이라 하여 재정을 맡기도 했다. 궁정 유대인들이 통치자가 귀족들로부터 해방되도록 제도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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