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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공부

중상주의와 유대인(1)

경제사적으로 16~18세기 유럽은 중상주의의 시대였고, 이때 자본주의가 태동했다. 

 

중상주의(重商主義): 상업을 중시하는 정책. 무역을 통한 화폐(금, 은)를 중시했다. 

 

이 300년 동안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며, 값싼 원료와 수출 확대를 위해 식민지 개척이 중요시되었다. 그 결과 경제를 주도하는 상인들에게 힘이 생겨 상인 주의에 연하여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가장 이득을 본 계층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의 이동경로에 따라 브뤼헤 -> 앤트워프 -> 암스테르담으로 경제의 중심지가 옮겨지는데, 오늘은 이 부분을 정리해보겠다. 

 

 

 

브뤼헤의 시대

1096년 1차 십자군 전쟁으로 영국 내 반유대 정서가 고조되자 많은 유대인들은 바다 건너 플랑드르로 이주했다. 이후, 1290년 3차 십자군 전쟁때 유대인들은 영국에서 일시에 추방되었고, 그들도 플랑드르 지방 브뤼헤 항구로 몰려들게 됐다. 브뤼헤에 모이게 된 유대인들은 모직물을 고급화하여 최고의 정기시인 샹파뉴 정기시와 영국에 판매하였다.

 

 

 

13세기 말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지중해 무역이 확대되자 제노바, 베네치아, 브뤼헤의 정기 교역이 가능해지고, 브뤼헤에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샹파뉴 정기시를 앞서게 된다. 브뤼헤는 여러 물품의 수출입을 감당하는 통과 무역이 번창했고 유럽 최대의 모직물산업 지역이 된다. 

 

15세기 말 다시한번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유대인 30만 명이 추방되어 브뤼헤와 앤트워프,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한다. 유대인이 이주하자 스페인, 포르투갈 항구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대신 브뤼헤에서 중계무역이 발달하게 된다. (중계무역은 통과무역과 달리 수출을 위해 수입을 했다가 다시 파는 방식으로 유대인이 무역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뤼헤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츠빈 강의 수로가 점점 막히면서 쇠퇴하였고, 인근의 항구도시인 앤트워프로 옮겨가게 된다. 

 

 

앤트워프 시대

포루투갈에 유대인이 사라지자 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 후추 등을 유통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이 있던 앤트워프로 보내게 되고 당신 최고 부가가치 상품인 인도산 향신료, 금은보석, 다이아몬드를 취급하게 된다. 

 

16세기 전반의 앤트워프는 발트해 무역, 스페인 무역 중심지로서 유럽, 동인도, 신대륙 상품을 거의 모두 취급했고, 역사상 최초로 "세계시장"이 된다. 

 

앤트워프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스페인에서 추방될때 숨겨가지고 온 보석 장사부터 시작하였다. 다이아몬드는 이윤이 높은 장사였기에 인도에 있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들여와 가공해 수출도 하게 된다. 유대인은 다이아몬드의 수입-가공-수출-유통 프로세스를 장악하여 시장을 독점한다. 

 

앤트워프에서 취급하던 히트상품중에는 설탕이 있었다. 서구에 설탕이 알려지게 되고 사탕수수와 설탕 제조비법이 전해지자 설탕은 왕, 귀족들만 애용하는 권위의 상징이 된다. (당시 유럽에서 1kg에 수소 한두 마리 가격이 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을 직접 경영하여 재배-운반-정제-판매 프로세스를 장악하고 독과점체제를 완성한다. 

 

중계무역을 위한 자본력, 금융 운용실력이 중요해지자 유대인들은 신용대출과 환어음, 유가증권 제도를 시작한다. 이로 인해 유동성이 크게 늘어나 상업, 해상교역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유대인이 계발한 환어음

중세시대 무역시 금, 은을 직접 주고받는 일 대신 증서를 받아 화폐로 사용하던 것이 환어음으로 발전되었다. 어음을 발행한 자신이 돈을 지급하는 방법(약속어음)이 아닌, 제3자가 돈을 지급하는 방식(환어음)으로 약정된 시기에 무조건 지급되게 하여 어름의 신뢰성을 높였다.

 

앤트워프는 큰 도시가 아니었지만, 1500년 무렵 유대인들이 몰려오게 되면서 중계무역과 금융업으로 커지게 되고 5배 큰 도시로까지 성장했다. 유럽 5대 도시(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파리, 앤트워프)중 하나로 성장하게 되는데, 앤트워프가 16세기 후반 쇠퇴하기 전까지의 번영은 유대인 거주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암스테르담 시대

16세기 후반 앤트워프에 스페인이 침공하자 도시를 지키기 위해 용병을 끌여들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보수를 하지 못하자 용병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이때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간다. 암스테르담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였기 때문에 유대인으로서는 유리했다. 결국 앤트워프가 스페인에게 정복되자 앤트워프에 남아있던 유대인들까지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를 했다.

 

 

 

유대인들이 이주하자 암스테르담의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부유한 상인과 예술가들도 함께 몰려들었다. 앤트워프가 누렸던 영광은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고, 그 규모가 더욱 커져 유럽의 최대 항구로 급성장했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개신교도(프로테스탄트)가 출현했고, 처음에는 개신교도와 유대인은 비교적 잘 지냈다. 종교개혁이 교황 중심의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을 무너뜨려 유대인에 대한 노골적인 격리가 끝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시작했던 루터가 유대들에게 개신교로의 개종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루터는 유대인들을 독일에서 내쫓는 일에 앞장서게 됐다. 

반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것이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개신교의 칼뱅은 상인을 지지했다. 또한 이자를 받고 대부하는 일에서도 찬성했기에 네덜란드에는 칼뱅파가 널리 퍼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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