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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

(중세) 신대륙과 정복자들 신대륙이 발견되고 난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그곳으로 건너가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자 했다. 그들은 정복자가 되어 원주민들과 전쟁을 했고, 정복자끼리도 이권을 두고 다투었다. 결국 그들은 각자의 식민지를 세우고 정복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스테크와 잉카 도시에 쳐들어가 멋대로 파괴했다. 노예무역 새로운 땅에 정착해서 살아가려다보니 일손이 부족했던 정복자들은 북 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노예를 사서 들여왔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하자 중앙아메리카의 원주민, 아프리카의 주민들도 납치해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다. 서 아프리카에서 서인도 제도에 이르는 길은 중앙 항로하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노예들을 데리고 오는 뱃길에서 몇 달간의 시간은 참으로 비참했다. 신대륙에 도착해서도 노예들은 죽도록 일만 해야 했다. 유.. 더보기
(중세) 아메리카 대륙의 왕국들 콜럼버스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수천 년 전부터 이곳에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북 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남 아메리카로 나뉘는데,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했던 곳은 중앙아메리카에서 조금 떨어진 섬들이었다. 마야 제국 중앙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제국은 마야 제국이었다. 마야인들에게는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일이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마야인의 도시에는 돌로 쌓은 피라미드가 있고 그 꼭대기에 사원이 있었다. 마야인의 왕은 태양신의 후손이라 여겨져 어릴 때부터 외모도 그들이 원하는 신의 모습이 되도록 애썼고,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마야인들이 신을 섬기는 방법은 몸에서 피를 내는 것이었는데, 전쟁 전에는 왕이 피를 흘려야 했고, 전쟁 포로들을 죽여 제사했다. 마야 .. 더보기
(중세) 신대륙 탐험 오스만 투르크가 실크로드를 장악하자 유럽 사람들은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 시기 여러 위대한 탐험가들의 항해가 시작됐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탈리아 사람이었던 콜럼버스는 인도에 가기위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반대로 대서양 쪽을 가로질러 가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뱃길을 연구한다. 탐험에 필요한 돈을 구하기 위해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국왕에게 찾아갔지만 거절당하고, 스페인의 페르난도와 이사벨 여왕에게 지원을 받게 된다. 콜럼버스는 1492년 니냐, 핀타, 산타 마리아라는 세척의 배를 끌고 서쪽으로 향한다. 실패의 기운이 감돌 무렵 콜럼버스는 육지를 발견한다. 콜럼버스는 그 땅이 인도라고 생각하고 원주민들에게 인디언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지만, 그곳은 미국 플로리다 주의 연.. 더보기
(중세) 인도의 무굴제국 인도의 황금시대였던 굽타 왕조 이후 훈족이 쳐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인도는 다시 여러 개의 왕국으로 쪼개졌다. 그중 가장 큰 왕국은 델리 시 주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슬란 교도 전사가 그 왕국을 정복해 술탄이 된다. 무굴왕조의 시작, 바부르 오스만 투르크의 변방의 지도자였던 이슬람교도 왕자 바부르(칭기즈칸의 직계 후손)가 자신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델리 시 술탄의 왕국에 쳐들어간다. 병력은 약했지만, 전쟁에서 이겼고, 바부르는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다. 이후에도 주변 왕국들을 정복해나갔고, 인도의 힌두교도들을 존중하고 법을 지키며 교육을 시키는 등 인도를 번영케 한다. 바부르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그라 강둑 곳곳에 아름다운 정원을 꾸민다. 정원에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물레방아를 설치하고, 삼.. 더보기
(중세) 아프리카 유럽 사람들에게는 "암흑의 대륙"이라고 불렸던 아프리카 대륙은 북부 해변과 사하라 사막 밑으로 열대우림, 초원, 강과 언덕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지역은 유목민들이 살아왔기에 기록이 없지만, 서 아프리카의 왕국은 유럽 사람들과의 왕래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서 아프리카의 가장 큰 왕국은 가나, 말리, 송가이였다. 가나 왕국 가나 왕국은 농경사회를 이루었고,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기도 했는데 대장장이들은 마술사 같은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 아랍상인들은 북 아프리카의 소금을 가지고 내려가 남 아프리카의 금을 사는 식으로 무역을 진행하였는데, 길목에 자리하고 있던 가나 왕국이 통행세를 받으면서 부유해졌다. 역사가 알 바크리의 가나 왕국 묘사 국왕은 금 목걸이와 글 팔찌를 했고, 금을 촘촘히 박은 모.. 더보기
(중세)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사벨 여왕의 스페인 재정복 이후, 스페인 지역은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서쪽 해안 지대의 포르투갈로 나뉘게 되었다. 스페인 건국 카스티야 왕국의 엔리케 국왕은 카스티야를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고 싶어 여동생 이사벨과 페드로 기론이라는 유명한 전사의 결혼식을 주선한다. 하지만, 이사벨은 그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또다시 포르투갈의 국왕과의 결혼을 주선했지만, 여동생 이사벨은 그 결혼을 원하지 않았고, 대신 아라곤 왕국의 왕자인 페르난도와 결혼한다. 결국 엔리케가 죽자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과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는 두 왕국을 합쳐 스페인이라는 큰 왕국을 세운다.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 정복 스페인 반도 남쪽에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는 그라나다라는 왕국도 통일하고자 스페인은 10년간 전쟁을 치러 .. 더보기
(중세) 백년전쟁 헨리 5세 VS 샤를 6세 프랑스와 영국은 영토문제로 흑사병 기간을 포함해 백 년간이나 전쟁을 치렀다. 전쟁을 종료시키고 싶었던 영국의 왕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왕 샤를 6세의 딸과 결혼시켜 달라고 한다. 하지만 샤를 6세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헨리 5세는 프랑스로 쳐들어간다. 처음에는 작은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했고, 겨울이 닥쳐오자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아쟁쿠르 전쟁'을 치르게 되고, 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다. 그로 인해 헨리 5세는 프랑스 영토를 차지하게 됐고, 샤를 6세의 딸과도 결혼하게 된다. 잔 다르크 헨리 5세가 죽고나서 헨리 6세는 1살 나이에 영국과 프랑스의 왕이 된다. 프랑스 국민은 헨리 6세를 반기는 부르고뉴 파와 샤를 6세의 아들(도팽)이 왕이 되어.. 더보기
(중세) 장미전쟁 영국은 국외 전쟁뿐 아니라, 왕위를 놓고 내전도 벌였다. 랭커스터 가와 요크가의 싸움이었는데 그 가문들의 상징이 장미였기에 이 전쟁은 '장미전쟁'으로 불린다. 헨리 6세 VS 에드워드 4세 장미전쟁은 헨리 6세 때 일어난다. 헨리 6세가 갑자기 광기를 일으키게 되어 병이 다 나을 때까지 요크 공장에게 섭정(국왕 대리)을 부탁한다. 헨리 6세의 병이 다 나았는데도 요크 공작은 섭정 자리를 내놓지 않자 전쟁이 벌어져 헨리 6세가 다시 나라를 다스린다. 하지만 요크 공작의 아들이었던 에드워드가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고 헨리 6세를 감옥에 가두고 자신은 왕좌에 올라 에드워드 4세가 된다. 에드워드 4세는 집안이 싫어하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고 영국정부 주요직에 그녀의 오빠들을 세운다. 영국.. 더보기